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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사코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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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르사코프 해전은 1904년 8월 20일, 러일 전쟁 중 러시아 순양함 노비크와 일본 순양함 쓰시마 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황해 해전에서 패배한 노비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중 코르사코프에서 석탄을 보급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았다. 쓰시마의 공격으로 노비크는 손상되었고, 결국 자침했다. 이후 노획된 노비크는 일본 해군에 편입되어 스즈야로 사용되었으며, 이 해전은 러시아 해군의 전력 감소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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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사코프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코르사코프 해전
전쟁러일 전쟁
시기1904년 8월 20일
장소사할린 코르사코프 해역 (오호츠크해)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교전국 2러시아 제국
지휘관 및 병력
일본군 지휘관다카기 스케키치 대좌 (치토세 함장)
센토 다케나카 중좌 (쓰시마 함장)
러시아군 지휘관막시밀리안 폰 슐츠 중좌
일본군 병력순양함 2척 (치토세, 쓰시마)
러시아군 병력방호순양함 1척 (노비크)
피해 규모
일본군 피해쓰시마 손상
러시아군 피해노비크 자침 후 일본 해군이 노획
관련 이미지
러시아의 방호순양함 노비크
러시아의 방호순양함 노비크
해전 후의 노비크
해전 후의 노비크 (자침 상태)

2. 코르사코프 해전 이전의 상황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노비크만주 뤼순 (포트 아서) 항에서 일본 해군에 의해 봉쇄된 제정 러시아 해군 함대의 일부였다. 1904년 8월 10일 황해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패배하면서 함대는 흩어졌고, 일부 함선은 뤼순으로 돌아가거나 황해 남쪽의 중국 항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폰 슐츠 제2계급 대령의 지휘 하에 있던 노비크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으로 향하려 했으나, 독일 자오저우 만 조차지에서 석탄을 조달한 후 일본 동쪽을 돌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할 계획을 세웠다.[1]

8월 11일, 노비크는 사이공으로 향하던 디아나 및 구축함 그로조보이와 만났지만, 슐츠는 다른 두 함선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1] 디아나의 지휘관은 일본군에게 포획될 것을 우려하여 사이공행을 결정했고, 디아나와 그로조보이는 상하이에 정박했다.[1] 노비크는 그들과 헤어져 단독으로 항해했다.

2. 1. 일본군의 추격

일본군은 1904년 8월 14일까지 노비크의 위치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3일, 중립국 상선이 상하이와 나가사키 사이 동중국해에서 노비크와 유사한 순양함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통해 노비크가 규슈 남쪽 오스미 해협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2]

일본군은 처음에 방호순양함 니이타카와 쓰시마에게 쓰가루 해협으로 진격하여 노비크를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이후 러시아 방호순양함 아스코르트를 찾기 위해 상하이 지역에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명령을 취소했다.[3]

8월 14일, 노비크는 오스미 제도 야쿠시마 남쪽을 지나 태평양으로 진입했고,[4] 일본 상선의 목격 보고를 통해 일본 해군 사령부는 추격을 조직했다.[4] 방호순양함 치토세와 쓰시마는 쓰가루 해협으로 진격하여 노비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센토 타케나카 지휘관이 지휘하는 쓰시마는 하코다테에 도착하여 치토세와 합류했다.[4] 노비크가 나타나지 않자, 쓰시마는 라페루즈 해협을 조사하기 위해 북쪽으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

2. 2. 노비크의 코르사코프 도착

''노비크''는 일본 동쪽을 항해하는 동안 경제적인 속도로 항해했지만, 일본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전에 코르사코프에서 석탄 보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6] 1904년 8월 20일 일출에 코르사코프에 도착했으며, 미하일 표도로비치 폰 슐츠 지휘관은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 야간에 라페루즈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 석탄과 물을 보급할 계획이었다.[6] 그러나 낮 동안, ''노비크''의 무선 장치는 근처 일본 무선 활동의 징후를 감지했고, 오후 동안, ''노비크''의 승무원은 ''쓰시마''의 연기를 목격했다.[6] 슐츠는 코르사코프에 갇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 8월 20일 이른 오후에 계획을 수정하고 석탄 보급을 중단하고 즉시 라페루즈 해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6]

3. 코르사코프 해전

1904년 8월 10일, 황해 해전에 참가했던 러시아 제국 해군의 2등 순양함 노비크는 뤼순 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독일자오저우만 조차지에서 석탄을 보급받고 태평양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려 했다.

영국 배가 자오저우만을 떠나 태평양으로 향하는 노비크를 목격했고, 이 정보는 대본영을 거쳐 도고 헤이하치로가미무라 히코노조에게 전달되었다. 도고노비크 요격을 위해 방호순양함 지토세를 파견했고, 가미무라는 방호순양함 쓰시마를 파견했다. 두 함선은 동해를 거쳐 홋카이도 방면으로 향했다.

8월 19일, 쿠릴 열도의 망루에서 오호츠크해로 향하는 노비크가 발견되었고, 지토세쓰시마는 소야 해협으로 향했다. 8월 20일, 노비크는 석탄 부족을 우려하여 사할린의 코르사코프 해안에 정박했다.

노비크 함장 해군 중령


16시경, 쓰시마코르사코프에 접근하자 노비크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어 포격전이 벌어졌다.[6] 노비크도 응사했지만, 쓰시마의 강력한 무장에 의해 수선 아래에 5발의 명중탄을 맞아 보일러 절반이 작동 불능 상태가 되고 조타실이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6] 노비크코르사코프로 돌아갔고, 쓰시마가 추격했지만, 노비크쓰시마의 수선에 명중탄을 기록하면서 쓰시마는 추격을 포기하고 긴급 수리를 해야 했다.[7]

쓰시마가 손상을 수리하는 동안 지토세가 현장에 도착했다.[8] 두 일본 순양함은 노비크의 탈출을 막기 위해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밤 동안 코르사코프를 감시했다.[8] 그러나 노비크의 조타 장치는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고, 노비크 함장 슐츠는 노비크를 얕은 물에서 자침하도록 명령했다.[8]

코르사코프 앞바다에서 자침된 ''노비크''.


이 해전으로 러시아 해군의 전력은 감소되었고, 통상 파괴의 위협도 줄어들었다.

3. 1. 해전 이후

8월 21일 새벽, 치토세는 항구에 진입하여 노비크가 모래톱에 침몰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잔해에 포격을 가한 후 철수했다.[8] 일본 보조 순양함 홍콩마루와 닛폰마루는 노비크 잔해에서 탈착 가능한 장비와 대포를 떼어냈다.[9] 노비크 승무원 60명은 코르사코프에 주둔한 러시아 제국 육군 병력에 배속되어 일본 제국 육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이도록 명령받았다.[10]

1905년, 일본 공병대는 노비크를 인양하여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수리했고, 1906년 8월 20일 통보함 스즈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다. 1912년 2급 연안 방어함으로 재분류된 스즈야는 1913년에 고철로 매각되었다.

4. 평가

이 해전은 러일 전쟁의 추세를 결정짓는 전투는 아니었지만, 러시아 해군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 해군이 벌이고 있었던 통상 파괴 작전의 위협도 감소시켰다. 이후 노비크는 일본 해군에 의해 인양되어 수리된 후 일본 해군에 편입되어 통보함 스즈야가 되었다.

5. 대중 문화

알렉산드르 스테파노프의 소설 『포트 아서』와 발렌틴 피쿨의 『강제 노역』에 묘사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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